제19호 2012년 겨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우선 나부터 살려고 유기농사를 지었어요” - 충남 세종시 고송공동체 이병주 씨

김성희

“이만큼도 감사해요. 나보다 훨씬 더 심한 피해를 당한 사람도 많으니께. 농사짓다보면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지 매년 아무 일 없을 수 있나요?”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이병주 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갈퀴처럼 거칠어진 손, 어디 한 점 군살이라고는 붙어 있지 않은 깡마른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한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초대형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강타한 지난여름, 서울에서는 그 위력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태풍 무섭다는 것은 지나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텔레비전 뉴스 화면으로 과수원마다 수북하게 떨어져 쌓인 사과와 배를 보면서 수확의 순간을 기대하며 일 년 내 땀을 쏟았을 생산자들의 심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주 씨의 경우는 2천 평 남짓한 과수원에서 수확을 앞두고 있던 배가 절반가량 떨어졌다. 연간 수입의 절반이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만큼도 감사하다”는 말은 마치 세상의 죄업을 대속하는 어떤 성자의 말처럼 엄숙하게 들렸다. 한 세기에 한 번 올까말까 한 가뭄이나 혹한과 폭염, 관측 최고치를 뛰어넘었다는 집중호우가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작물들은 몸살을 앓고 수확은 매년 들쭉날쭉 불안정하다. 세계 곡물시장이 요동치고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급기야 22.6%까지 곤두박질했다. 남아돈다던 쌀마저 83%밖에는 자급하지 못했다.

 

 

영호남으로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 100세대가 농사짓던 송성리

계절은 겨울을 향해 정해진 속도대로 질주하고 있었다. 사료로 쓰려고 볏짚을 커다란 원통으로 말아놓은 덩어리들만 덩그러니 놓인 들판은 황량했다. 이병주 씨를 찾아가던 날도 그런 무렵이었다.
이병주 씨가 사는 마을은 천안에서 공주를 통해 호남으로 뻗은 길과 조치원을 거쳐 영남으로 뻗은 길이 갈라지는 부근에 있다. 충청남도 연기군 전체와 공주시 일부, 충청북도 청원군 일부를 포괄한 ‘세종특별자치시’가 2012년 7월 1일에 출범해 그가 사는 전동면 송성리도 이제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었다. 영호남으로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인데다 주변을 산들이 두르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인근 산들에는 운주산성, 고려성, 금이성 등 백제와 고려에서 쌓았다는 성들이 여럿 있다. 예전에는 100여 세대가 모두 농사를 짓던,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60~70가구 정도만 남았다. 그중 절반가량인 30여 가구만 농사를 짓는다. 이들 가운데 열 가구가 한살림 생산자 회원이다.
마을 초입에는 정미소가 있다. 한살림에 내는 쌀들이야 아산에 있는 푸른들영농조합법인으로 실어다 찧을 테지만 여느 논들의 벼는 모두 이리로 몰려와 있을 터였다. 타작마당이 흥겨워야 할 텐데 보는 이의 선입견 때문인지 오가는 농부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심지어는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때, 벼 한 톨마다 농부의 손길 여든여덟 번이 닿아있다는 말이나,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세상 모든 이치를 깨우친 것과 같다(食一碗萬事知)던 해월 선생의 말씀이 선거에 나선 후보들에게 일말의 울림이라도 줄까? 이제는 농업을 국가의 기본 산업으로 대우하기보다 일종의 동호회 활동처럼 치부하는 경향마저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레토릭으로조차 선거운동 공간에 휘날리지 않는다.


거창한 뜻보다 농약에 못 견디는 몸 때문에 유기농을 할 수밖에

이병주 씨는 1943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 살이 되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한평생 유기농으로 농사지으며 살아왔다. 젊은 시절인 1970년대 초에 남들이 대개 그렇게 하기에 무심코 잠깐 농약을 쳐본 적이 있는데 몸이 감당하질 못했다. 농약에 중독돼 쓰러진 것이다. 회복한 뒤로는 이웃에서 농약 치는 냄새만 맡아도 정신을 잃곤 했다.
“우선 나부터 살아야 했으니까 유기농을 할 수밖에 없었지.”
유기농업에 대해 무슨 거창한 뜻을 세우고 시작한 일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병주 씨가 농사를 시작한 무렵에는 물론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없었다. 아버지가 농사짓던 방식 그대로 퇴비를 내고 그것으로 땅심을 기르고 일일이 낫이나 호미로 풀을 매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농약과 화학비료가 일반화됐다. 화학비료의 힘은 그가 보기에도 놀라웠다.
“나무 밑에 한 줌만 뿌려주면 소달구지로 퇴비 몇 번 끌어다 부운 것보다 나았으니까.”

제초제의 편리성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 그의 몸은 그런 편리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친환경농업에 대한 정부인증이 생겨나기도 훨씬 전, 한살림조차 출범하기 훨씬 전부터 조상대대로 해오던 방식 그대로 화학약품에 의존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왔다.
이병주 씨의 집은 마을을 거의 다 거슬러 올라가 숲에 잇닿은 부근에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집을 헐고 15년 전에 지었다는 빨간 벽돌 슬래브 집에는 이제 일흔이 된 그와 한 살 아래인 아내 심점순 씨 내외가 산다. 내외는 아들 둘과 딸 셋, 오남매를 낳아 이 집에서 길렀다. 서른아홉 살 막내아들을 빼고는 모두들 출가해 천안과 대전에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
그의 집안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세 살 되던 해부터였다. 이병주 씨의 나이가 일흔이니 대략 90년 전 쯤, 1920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도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한다. 이병주 씨는 육남매의 장남이었다. 그때 집안 장남들의 어깨에 얹히는 부담은 왕조의 세자들만큼이나 무거웠다. 장남에게 가업과 집안제사를 물려주는 것이 무슨 신앙과 같았다. 한국전쟁 난리 통에 국민학교에 들어갔지만 5년쯤 다니던 학교를 채 다 마치지도 못했다. 장남은 농사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이었다. 이병주 씨가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열의를 보이자 아버지는 여간 초조해 하지 않았다. 더 배우겠다며 훌쩍 품을 떠나버릴까 불안했던 것이다. 열두 살 무렵부터 줄곧 장정 한 사람 몫을 도맡아 하다 불과 열아홉 살에 집안 농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누나와 동생 넷에 부모님까지 모두 그가 짓는 농사로 생계를 잇게 되었다.

 


 

배나무 그늘에 밭을 일궈 토종종자를 채종하며

“여기 구절초는 발그스름한 게 참 곱네, 우리 집에 있는 건 왜 허옇기만 한 겨.”
“이 꽃망울이 밤 되면 오므라들잖여, 그렇게 움추러든 걸 따서 말려야 차가 된다니께. 활짝 핀 건 향이 다 달아난댜.”
세종시에서 열린 회의에 참여하고 오는 이병주 씨를 그의 집 마당에서 만났다. 함께 온 이는 이십여 년 동안 줄곧 고송공동체를 함께 꾸려온 김영문 총무였다. 집 앞에 핀 구절초를 두고 일흔이 넘은 두 농부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을마다 집 주변에서 피고 졌을 구절초를 예사롭지 않게 보지 않는 그 마음,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시대를 앞서서 연기군 일원에 유기농업 생산자공동체를 일궈온 동력이 됐지 싶었다.
이병주 씨의 농토는 집에 잇닿아 있는 8백 평 가량의 배밭과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논과 과수원이 전부다. 배밭은 현관문을 나서면 마당가에 바로 붙어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줄곧 한집에 살며 같은 밭을 일구었다니 근 백 년 가까이 삼 대째 갈고 다듬어온 밭이다.
배는 완전히 유기재배를 하기 어려운 작물이다. 이병주 씨의 배밭도 부득이 저농약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나 한살림에 내는 과일은 맹독성농약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살포 횟수도 대개는 절반 이하로 하는 등 정부가 인증하는 저농약농산물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재배하고 있다. 2015년 이후로는 정부의 저농약인증제가 폐지된다. 한살림은 엄격한 독자기준에 따라 생산자가 스스로 생산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소비자들이 생산지를 방문해 점검활동을 벌이는 ‘자주관리 자주점검’ 제도를 시범 도입하기로 했다. 이병주 씨가 사는 송성리의 배밭도 이 제도가 시범 적용된다. 그런데 배밭의 풍경이 조금 색달랐다. 배나무 아래 이곳저곳이 밭으로 일궈져 있었다.
“마늘, 취, 콩, 팥, 고추 우리 먹을 건 다 여기서 길러요. 나무그늘이지만 그래도 잘 자라요. 요새는 유기농 기술도 많이 발전하고 친환경 자재도 많이 나와 있는데, 나는 뭘 억지로 어떻게 하기보다는 자연 그대로 조화를 이루게 하자 생각해요.”
가족들이 먹을 양식을 자급하자는 생각도 있지만 토종종자를 채종하려는 목적도 있다. 거실에는 십여 가지 콩과 팥 등 올해 채종한 종자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약용으로 쓰는 토종 팥이라며 짙은 회색이 도는 ‘제팥’을 일러주었다. 토종종자 갈무리는 단짝인 김영문 씨가 한수 위라고 한다. 김영문 씨는 지금도 백여 가지 이상의 종자를 수집해놓고 있다. 종자며 농재며 모두 다국적 기업들의 손에 넘어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이 밭에는 있는 배 종자는 대부분 신고(新高)예요. 일본사람들이 왜정 때부터 퍼트린 종자인데 우리나라 배가 대부분 이것이잖아요. 그런데 신고는 자가수분이 안 돼요. 열매 맺으려면 다른 꽃가루로 수분을 해줘야 해서 추황이라는 종자를 스무 그루에 한 그루씩 심어놨어요.”
언뜻 보기에 가운데가 아래쪽으로 불룩하게 솟아 있어 조금 못생긴 배와 익숙하게 보아온 둥그스름하고 큼직한 배 두 개를 가져와서는 대충 깎아서 먹어보라고 했다. 뜻밖에도 못생긴데다 얼룩덜룩 표면에 검은 반점이 잘 생긴다는 배가 훨씬 더 달고 아삭했다. 추황이라는 품종이다. 그런데, 이병주 씨 같은 한살림 생산자들처럼 추황과 신고를 과수원에 섞어 심어서 자연수분을 하는 경우는 이제 드물다고 한다. 대개는 꽃가루를 사다가 인공수분을 한다. 국산 꽃가루는 20g들이 한 봉지에 6만 원에서 8만 원가량인데 중국산은 1만7천 원이면 산다. 이 때문에 여느 농가에서는 중국산 꽃가루를 쓰는 일이 많아졌다. 사고파는 일만 바라보면 농사도 생산 단가를 낮추는 쪽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 농사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산 꽃가루가 값은 싸겠지만 안전성 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더 경쟁력을 갖추라고, 더 효율이 높은 존재가 되라고, 우리 시대는 이렇게 서로를 채근하고 있다.


 

 

혼인한 지 사십 년, 남편은 농사짓고 아내는 장에 팔고

수확이 끝나도 배는 끝없이 가지를 뻗는다. 엄동설한에 잠시 주춤하겠지만 겨울에도 생장은 멈추지 않는다. 배 농사를 짓는 이들은 봄이 올 때까지 퇴비를 넣어 땅심을 살리고 수확할 가지만 남기고 가지치기를 한다. 어떤 가지를 살려서 결실을 맺게 할지는 햇빛을 받는 방향, 작업의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이병주 씨는 본능처럼 익숙하게 나무의 상태를 살피고 가지를 솎아준다. 배나무는 가지만 잘 관리하면 밑동이 백 년이 더 된 나무도 젊은 가지에서 왕성하게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나무 한 그루에 뻗어있는 큰 가지만도 여러 개고 거기서 뻗어나는 줄기는 수백 개는 될 것이다. 전지가위를 들고 이들을 끊어 내면서 수확을 유도하는 일을 천 평 이천 평으로 늘려서 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투여해야 할까?
“아직까지 일손을 돈 주고 빌린 적은 없어요. 사람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나는 또 내 나름대로 해야 성에 차니까. 한창 바쁜 때는 새벽 세 시면 일을 시작해요. 아침 여덟 시까지 그날 할 일을 다 해놓고, 한살림 회의도 가고 교육도 가고 바깥일을 봐요.”
배밭에 선 채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는 사오 리가량 떨어진 장터로 아내를 데리러 갔다 와야 한다며 경운기 시동을 걸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전의면 소재지에 서는 오일장은 파장 무렵이라 한산했다. 종일 장마당에 나앉아 있었을 아내 심점순 씨는 남편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혼인한 지 40년도 넘었어요. 1970년인가, 이 마을에 살던 작은어머니 소개로 시집을 왔어요. 그땐 차도 안 다니고 전기도 없는 시골이었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심점순 씨는 몇 번 만나지 않고도 남편의 됨됨이가 믿음직해 혼인을 결심했다. 예나 지금이나 도회지 살던 사람이 벽촌에 들어가 살 결심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경운기를 몰고 어둠이 짙어가는 들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저 사람이 서울서만 살아서 농사일 힘들까봐 농사일은 내가 혼자 하려고 해요. 시골 와서 고생하니까 지금도 내가 아껴주려고 해….”
이병주 씨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내를 무사히 귀가시킨 뒤에야 마을 한쪽에 있는 한살림 교육장에서 열리는 고송공동체 월례회의에 참여해 회의를 이끌었다. 20가구가 참여하는 고송공동체라는 이름은 그가 사는 송성리와 10여 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소정면 고등리의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모아 지었다. 그는 20여년 된 이 공동체를 처음 조직한 사람이면서 이제까지 시종일관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장기집권인 셈이다. 그보다 한 살 위인 김영문 총무는 고등리에 살고 있다. 이이 역시 이십여 년째 총무로 붙박이다. 그러나 회원들의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뜻을 모아 시작한 공동체는 지금까지도 원칙을 지키며 유지되고 있다. 시장 농산물 값이 폭등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공들인 유기농 농산물을 시장 관행먹을거리보다 오히려 헐한 값으로 내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더 받겠다고 약속을 어기고 시장에 출하한 회원들은 없었다고 한다.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고 힘을 모으는 일은 물론이다.

 


 

투명한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위해 고송공동체 결성

한살림이 처음 출발하던 1986년부터 이병주 씨와 김영문 씨는 쌀이나 된장 엿기름을 내던 생산자였다. 이병주 씨는 서울 제기동 한살림농산 첫 가게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다. 한살림 초창기인 1980년대 중반, 이 마을에서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있던 이들은 전의신협에 물품 출하를 의탁했다. 따로 운송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의신협이 중간이윤을 너무 많이 떼는 것을 알게 됐다.
“쌀 한 가마에 2만 원씩을 떼지 뭐유. 우리가 전부 3천 가마 냈는데, 중간에 떼는 돈만 얼마야. 그 돈으로 농민들 교육을 시켜주든가 뭐 보람 있는 데 쓰는 것도 아니고.”
그뿐 아니라 전의신협이 내던 된장의 원료인 콩을 인증하는 문제도 투명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국가에서 친환경농산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인증제도를 도입하고 관리를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법과 제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한살림이 해오던 유기농, 무농약 농산물 직거래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살림이 정한 기준에 따라 진행하고 있었다. 생산자들은 영농일지 등을 통해 농자재 사용을 입증하고 실무자와 소비자들이 빈번하게 생산지를 방문하면서 쌓아온 신뢰를 기반으로 작물의 안전성을 검증해왔던 것이다. 신뢰가 흔들리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었다. 한살림도 농민들도 전의신협의 중간 거간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신념 있게 유기농업을 고수해온 이병주, 김영문 씨 두 사람이 앞장서서 공동체를 결성하고 직거래를 시작했다. 고송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됐다. 2000년경 일이다.
“내가 굉장히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살림 이전에는 유기농 농사짓는다고 어디서 알아나 줬나요? 그저 가족들끼리 나눠먹고 말았지. 그런데 한살림이 생겼잖아요. 박재일 회장님을 처음 만난 일도 잊히지 않아요. 유기농업에 대한 신념이 뚜렷한 분이 또 얼마나 소탈하시던지,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뭐든 우선은 감사하게 먹어야 해요. 농약 친 것도 먹고 남들과 어울려야 해요.’ 하시던 게 참 기억에 남아요. 대개 자기 주장하기 쉬운데 말이죠.”
생명의 이치를 온 몸과 삶 전체로 실천하는 사람. 애써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익은 습관 자체가 교과서에서나 봄직한 그런 농부인 사람. 그가 인터뷰 말미에 한 이야기는 이랬다.
“언젠가 먹을거리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외국농산물 사다먹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날이 올 거예요. 나는 자식들한테 다만 얼마라도 꼭 땅을 유지하라고 말해요. 땅이라도 있어야 뭐라도 심어서 목숨을 연명할 게 아녜요. 지도자들이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우선은 곶감이 달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오래 지탱하지는 못해요. 싸게 사다 먹을 궁리만 하지 식량자급에는 관심들이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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