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호 2009년 겨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사람이 꽃 되고 꽃이 사람 되듯이_충북 영동 옥잠화 공동체를 일군 서순악 생산자

글 김성희, 사진 장성백

 

꽃이 사람 되고 사람이 꽃 되는 차, 그이가 만든 구절초 꽃차는 이런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곳을 찾았을 때 가을걷이가 끝나고 남아 있는 꽃이나 작물은 없었다. 농장주변에 지천으로 피던 들꽃 가운데 드문드문 구절초와 쑥부쟁이 몇 송이가 며칠 전 갑자기 몰아친 한파를 견디고 살아남아 있었다.


“가을마다 꽃차를 만들어요. 황토방에서 핀셋으로 뒤집어가며 정성껏 말리죠. 아는 사람들을 통해 팔아서 어린이집 냉장고도 샀고 운영비에 보태죠. 서울사람들한테는 한 병에 만 원, 이 동네 사람들한테는 육천 원씩 받아요.”

 


예의 핀셋으로 집어 여전히 보랏빛을 머금고 있는 꽃송이 하나를 찻잔에 내려놓고 뜨거운 물을 붓자 꽃잎이 풀어지면서 활짝 피어났다. 꽃보다 한발 앞서 그 꽃차에 응축돼 있던 향기가 피어올라 방안에 가득 찼다. 차를 마시는 일은 이렇게 지나간 시간들에 실려 있는 향기와 숨결을 조금씩 꺼내어 흠향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옥천에서 영동을 향해 뻗어 있는 4번국도가 굽이치며 흘러가는 금강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뻗어있는 그 길에서 인근에서 가장 크고 장쾌하다는 옥계폭포를 향해 오른편으로 꺾어져 계곡을 1㎞ 따라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그가 일군 터전들이 눈에 들어온다. 포도즙과 잼 등의 유기농 가공식품을  생산하는 옥잠화영농조합법인의 가공공장과 무수히 피었다 졌을 들꽃들 사이로 어린이집과 포도밭이 있다. 12월 준공을 목표로 한창 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새 어린이집의 3층 건물이 있고, 맨 꼭대기에는 회의도 하고 기도하는 작은 집이 한 채 있다. 그 위로는 계곡을 따라 국사봉까지 작은 골짜기가 뻗어 있다. 산록에서 번져 내려왔을 단풍이 한창인 골짜기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한살림의 대표적인 여성생산자이고 결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옥잠화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식구들과 어린이집에 날마다 오는 스무 명 남짓한 이 지역 아이들, 방과후 공부방에 모이는 초중고생들과 함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이는 결혼을 하지 않은 점에 대해 설명 하려는 듯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몸’이라고 했다. 가톨릭의 성직자로 봉임된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그렇게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늘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규정하고 살아왔지만 특히 4년 전에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 내면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따라 자신의 몸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차피 그는 어릴 때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평생 가톨릭의 그늘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가난에도 굴함없이 들꽃처럼 싱싱하게


그는 1946년, 해방된 이듬해에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나고 자란 집이 구미역에 바로 인접한 시내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리어카’를 만들어 팔았다. 자동차는커녕 소달구지나 지게 말고는 변변한 운송수단이 없던 시절이니 리어카는 요즘의 소형트럭만큼이나 요긴한 운송수단이었다. 그이의 말처럼 그의 아버지가 ‘지금의 현대자동차같은 첨단산업’에 종사한 덕에 꽤 부유했다. 그러나 유복했을 그 시절에 대해 그가 기억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전쟁은 그이의 집안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피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병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불과 네 살 때였다. 그 이후로 그가 겪은 세상살이는 시리고 고되고 서러운 일들 투성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5남 1녀, 자식을 건사하는 일이 어땠을지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겨우 짐작을 해볼 따름이다.


혼자 가계를 꾸려가던 어머니에게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셋째 딸을 중학교에 진학시킬 여력이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그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일하면서 학교 공부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커서 그런 것을 만들어야지.” 결심했다. 이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는 나중에 실현이 되었다. 훗날 노동청 카운셀러 시험에 합격해 구로공단에서 일할 때 그는 노동청에 공문을 보내 ‘14살 이상의 소년소녀 노동자들에게도 성인노동자와 동일한 처우를 해주어야 하며 특히 이들에게 일하면서도 교육받을 수 있게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담당 공무원은 노동청 소년소녀계장이던 지금 보건복지부 장관 전재희였다. 그는 서순악의 주장에 공감해 중등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근로여성교실을 설립하도록 추진했다고 한다. 한일합섬 같이 큰 공장에 고등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산업체부설학교들이 설립돼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학비를 대줄 수 없는 가난한 집 아이들도 하려고만 하면 고등교육까지는 스스로 일하면서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그 일이 지금 막 실현되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같은 또래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 구미중학교에 소사로 취직해 한 달에 쌀 한 말씩 받으며 일을 했다. 돈이 조금 모이면 학교에 다니고 돈이 떨어지면 휴학을 하면서 5년에 걸쳐 중학교과정을 이수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조차 꾸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때마침 구미중학교와 구미농고가 합병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낮에는 고등학교 수업을 받고 학교가 파한 뒤에 저녁 늦게까지 밀린 일을 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남들보다 5년 늦게 구미농고에 입학해 어렵게 학교를 마쳤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많았던 시절이기는 해도 그가 학교를 제 힘으로 다닌 일들은 듣기에도 눈물겨웠다. 그에게 각별한 향학열과 고집스러운 추진력이 없었다면 학업을 마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 했을 것이다.


24살 되던 1970년에야 그는 비로소 대구에 있는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지역사회개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고학으로 학비를 벌어가면서도 대학4H, 농촌경제연구회에서 농촌개혁운동에 꾸준히 참여했다. 그 뒤에 펼쳐진 그이의 인생을 떠올려보면 그는 제 갈 길을 일찌감치 스스로 선택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연구회는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채영신과 박동혁처럼 일제 치하 식민지 청년들의 심장을 격동시켰던 농촌계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학생운동의 흐름이라고 여겨진다.


그에게는 농촌현실을 개혁하려는 운동적 열망과 영적인 수행에 대한 향심이 함께 무성했던 것 같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수녀가 될 결심으로 부산에 있는 성베네딕도 수녀원에 입적했다. 대학 3학년 때인 1972년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려온 마음을 의지해왔으니 교회에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자는 결심이 그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뒤로는 그는 방학 때마다 수녀원에 가서 지냈고 학비도 그곳에서 대 주었다. 그러나 결국 수녀가 되지는 않았다.

 

 


“대신 대학을 졸업하고 구미에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회가 운영하던 근로여성복지관을 잠시 운영했어요. 어릴 때부터 고학을 했기 때문에 어린 노동자들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았어요. ”
그는 어떻게든 어린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싶어 일에 조바심을 냈다고 한다. 근로여성복지관 사감들을 조직해 모임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무렵 그는 노동청에서 카운슬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한 뒤 구로공단에서 일을 했다. 


“당시 구로공단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은 밥 굶는 것은 예사고 다쳐도 치료도 못 받고 처지가 비참했어요. 서른 살 때 여성근로교실 교사로 일할 때, 반장 아이가 공장에서 손을 베여서 피를 흘리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더라고요. 내가 수녀회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잖아요. 저도 그 아이에게 돈을 주고 치료를 받게 했어요. 그 돈은 내가 아니라 또 다른 어려운 이에게 갚아주라고 했죠.”


그 뒤 1977년, 가톨릭농민회 본부가 대전 성남동에 있던 시절 그는 그곳으로 일터를 옮긴다. 나중에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사단법인 한살림의 박재일 회장, 가톨릭농민회의 홍보부장이던 한살림사업연합 대표 이상국 같은 이들과 인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그 무렵 ‘쌀생산비 조사사업’ 등을 하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정부는 저임금에 기대 경제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고수하며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값에 쌀을 사들이려 했다. 이에 가톨릭농민회는 정부가 제시하는 수매가가 생산비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대적인 쌀생산비 조사사업을 전개했었다.
 

그 무렵 서순악은 《인간성장과 행동발달》등을 공부하며 공해가 사람에게 미치는 폐해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1978년에는 언니가 지니고 있던 일본의 아리요시 사와코가 쓴《복합오염》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종교적 양심에 비춰볼 때 도저히 농약과 화학비료를 땅에 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다.

 

노지재배 포도로는 국내 최초 유기농 인증을 받다


그가 영동의 후미진 골짜기 심천면 고당리에 897평의 땅을 사서 내려온 것은 1981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때였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이 대목인 것 같다. 중앙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 3차 학기를 마친 뒤,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다 털어서 땅을 샀다고 한다. 서른다섯이면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 나이에 여자 홀몸으로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는 이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단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또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렇게 과단성 있는 결정을 내리게 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옥계리 일대는 지금도 땅을 파보면 자갈투성이의 척박한 땅이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산 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을 부어도 금방 빠져나가고 퇴비를 줘도 비가 내리면 다 빠져나가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서른 다섯 살에 몸무게도 42kg으로 날씬한 처녀였어요. 밤낮없이 산에서 부엽토 긁어다 퍼붓고 물 길어다 붓고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누가 오줌 거름을 주라고 해서 통에다 담아가지고 들고 가면 동네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물어요. 차마 처녀 입으로 오줌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물비료라고 대답했어요.” 


그 척박한 땅에서 논농사 400평과 포도농사 400평을 짓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산에서 부엽토를 긁어오고 그것으로도 안 돼 트럭 수백 대분의 흙을 퍼 나른 뒤에야 가까스로 농사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흙이 금싸라기도 되는 것처럼 귀하고 아깝다고 했다. 메마른 땅에서 지을 수 있는 포도 농사는 캠벨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델라웨어밖에 없었다고 한다. 십여 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목초액이나 미생물발효퇴비 등을 이용하는 등 꾸준히 노력해 그는 1998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노지 재배 포도로는 최초로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한살림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3년부터 포도잼을 내면서 부터였다. 그 무렵 농촌연구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정명채 박사의 권유를 받고 농산물가공으로 눈을 돌려 포도잼을 생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공장 설립자금이 부족해 전통식품산업을 지원한다는 정부 보조금 6,000만 원을 신청했다. 잼이 무슨 전통식품이냐며 지원에 난색을 표하는 담당자에게 정과는 전통식품이고 잼뿐만 아니라 도라지와 인삼정과까지 가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게 설득했다.
 

그 해 가을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한살림의 가을걷이 잔치에 올라가 무작정 식빵에 잼을 발라 참석자들에게 나눠주면서 ‘홍보’를 했다. 실무자였던 박영천, 이사인 윤선주, 서형숙 같은 이들이 정직하고 깔끔한 맛의 포도잼을 생산하는 이 여성생산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이 때문에 이사회에 참석해 그는 자신이 생산하는 가공식품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고 포도잼과 딸기잼 포도즙 등을 한살림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되었다. 공동체 운영이 안정화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1993년 연말에 수안보에서 한살림 생사자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렸다. 당연한 듯이 모조리 남성생산자들 뿐이었다. 부여에서 딸기를 생산하는 강수옥 씨만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고 한다.


“농사를 남자 혼자 지었을 리 없잖아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당시 실무책임자였던 전표열 씨한테 내년에는 꼭 여성들도 모시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다음해도 또 남자들뿐이더라고요. 조완형 상무한테 이럴 수 있냐고 또 따졌죠. 조 상무가 예산은 마련해 뒀으니까 좋은 진행방안이 있으면 제안해 달라고 해요. 그래서 대전인가 청주에서 여성생산자들끼라 첫 모임을 하게 됐어요.”


일단 모임이 시작되니까 너도나도 자기들 고생하며 농사지은 얘기들을 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때로는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냈다. 울진 방주공동체 최정화 생산자가 유기농 농사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벌레를 감당할 수 없어 목사님을 불러 기도를 하기도 했다는 얘기며 음성에서 온 최재두 전 생산자연합회 회장의 부인 김영희 씨는 ‘다른 집 여자들은 비행기타고 여행가는데 생산자 부인들은 밭고랑만 타는구나’ 하고 노래부르던 얘기를 하면서 그는 통쾌한 듯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날 모임을 계기로 한살림 여성생산자모임이 시작되었다. 그가 초대 회장을 맡아 2002년까지 모임을 이끌었다.


“우리도 밭고랑만 타지 말고 비행기 타자. 왜 못타냐. 이러면서 매달 만 원씩 모았어요. 3년 뒤에 정말 제주도에 가게 됐죠. 경비가 모자라서 내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충당하겠다고 하니까 아산의 이호열 씨가 그럴 수는 없다면서 생산자연합회 기금 500만 원을 지원하게 해줬어요.”


배추벌레가 가르쳐 준 것들


“유기농 농사를 짓다보니 사소한 것도 허투루 보게 되지 않아요. 배추와 배추벌레는 우리가 보기에 원수 같잖아요. 그렇지만 배추를 먹은 배추벌레는 바로 배추이기도 할 거에요. 그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배추꽃에 날아오잖아요. 나비가 없이는 배추도 씨를 맺을 수 없는 거고요. ”


그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배추벌레 이야기를 자주 했던 모양이다. 당장에 배추벌레처럼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이 말을 떠올려보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우리 사회에 들어찬 도저한 일방주의와 배제의 논리, 증오와 갈등은 도대체 왜 끝 간 데를 모르고 한없이 자라나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를 고집도 세고 주장도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돌아서서 상처받고 가슴앓이를 하는 일도 많은 것 같았다.
“한 때는 자살도 생각했어요.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까 왜 내가 세상에 왔는지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세밀하게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편안하게 읽은 게 아니라 따지듯이 세세하게 읽었어요. 성경뿐만 아니라 불경에도 매달렸어요. 어느 순간에 읽다보니 모든 성인들의 생각과 말이 하나로 통하고 있다고 여겨졌어요.” 
 

그는 욕심을 내려놓고 진리를 논하는 순간 평범한 사람들도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리세인들로부터 ‘네가 무슨 신이냐’는 조롱을 받던 예수께서 ‘진리를 깨닫고 행하는 이가 바로 신’이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분명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을 가리켜 농담처럼 4차원이라면서 웃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옥계리 계곡을 두고 ‘과수원과 밭이 있으니 1차 산업, 가공공장 있으니 2차 산업도 하고 어린이집과 공부방 운영하고 있으니 서비스산업인 3차 산업도 있고 이 선녀탕 계곡 앞의 기도공간인 작은 집은 4차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생산에 관한 일은 후배인 김도준 생산자에게 맡기고 어린이집과 방과 후 공부방 운영, 영동여성농민센터 그리고 영동지역의 장애인복지관 이사등 지역의 사회복지현안에 참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은 새벽마다 계곡의 가장 꼭대기에 자그맣게 지어놓은 기도의 집에서 마음을 닦고 기도하는 일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그는 자신이 만든 구절초 꽃차를 선물로 주었다. 예의 그 ‘사람이 꽃 되고 꽃이 사람 되는 차’였다. 가끔 그가 당부한대로 유리잔에다 그 마른 꽃을 사뿐히 내려놓고 뜨거운 물을 정성껏 따라 차를 우려 마신다. 방안 가득 향기가 번지고 차를 머금으면 입과 코로 고당리 계곡에 번져있던 들꽃향기가 느껴진다. 배추벌레를 연상케 하는 나비들의 한가로운 날개짓도 떠오른다. 다른 이에게 이렇게 향기 한 모금을 나눌 수 있는 삶. 우리가 세상에 왔다가는 흔적이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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