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호 2015년 8월호 [특집] 특집-고추 먹고 맴맴

[ 고추와 관련한 말글살이 ]

고초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하다

글 박남일

한국인의 밥상에서 뗄려야 뗄 수 없는 고추가 말글살이에도 들어왔다. 밥상이 풍성해진 만큼이나, 고추와 관련된 말도 속속 생겨난 덕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엽. 조선에 초본식물 하나가 들어온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자생하다가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초본식물. 그 가지 끝에는 사내아이 거시기를 닮은 길쭉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푸른 열매는 삼복더위에 쏟아지는 햇볕을 머금고 빨갛게 익어간다. 열매를 따서 맛을 보니 혓바닥이 아리도록 맵다. 조선 사람들은 이 초본식물을 고초라 불렀다. 맵다는 뜻을 가진 말에 신, 열, 랄 따위가 있지만, 모두 제쳐두고 굳이 쓴맛을 나타내는 고를 쓴 까닭을 알 길은 없다.

이에 젠 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건너온 풀이라 하여 왜초, 남만초로 부르기도 하고, 또 매운 열매 맛을 산초에 견주어 번초, 남초 따위로 부르기도 했다. 또 당초라는 이름도 제법 쓰인 것으로 미루어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온 품종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여러 가지 가운데서도 고초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다가 점차 ‘고추’로 통용되었다.

한편 고추는 겨레의 생활 문화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아들을 낳으면 붉은 고추와 숯을 꿴 금줄을 대문에 걸쳐 놓는 습속이 생겼다. 이 겨레는 해나 불을 상징하는 붉은빛은 벽사의 의미를 가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추의 붉은빛이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주기를 바랐다. 또 가을에 장을 담그고 나서 빨간 고추와 숯을 꿴 새끼줄로 장독을 둘러놓거나, 아예 붉은 고추를 장독 안에 넣어두기도 했다. 장맛을 해치는 잡귀를 고추의 붉은빛으로 쫓아내려는 심사였다. 동해안 지방에서 하는 별신굿 굿상에 붉은 고추와 숯을 띄운 물그릇을 올리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겨레의 습속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는 잡귀를 쫓는 주술적 의미까지 얻게 되었다.

 

 

장맛을 해치는 잡귀를 고추의 붉은빛으로 쫓아내려는 심사로 선조들은 가을에 장을 담그고 나서 빨간 고추와 숯을 꿴 새끼줄로 장독을 두르거나, 아예 붉은 고추를 장독 안에 넣어두기도 했다.

 

 

밥상에 고추, 약방에 감초

고추는 맵다. 작은 고추는 더 맵다. 그런데도 묘하게도 그 매운맛에 입맛이 살아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게 되었다. ‘풋고추’나 ‘홍고추’를 잘게 썰어서 음식 맛을 내기도 하고, ‘건고추’는 ‘고춧가루’를 만들어 저장해 두고 필수 양념으로 쓴다. 또한 고춧가루에 찹쌀가루, 메줏가루 등을 섞어 만든 ‘고추장’은 된장, 간장에 버금가는 기본 장류로 오늘날까지 부엌을 지키고 있다. 이쯤 되면 ‘밥상에 고추’는 ‘약방에 감초’를 앞지르고 남는다.

고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 밥상을 넓게 차지해 왔다. 특히 된장을 곁들인 풋고추는 입맛 없는 여름철 단골 메뉴여서 보리밥 한 그릇쯤 뚝딱 해치우게 한다. 풋고추를 통째로 먹는 초간단 레시피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고추를 주재료로 하고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손맛을 낸 음식들이 사시사철 밥상을 풍부하게 했다.

풋고추 가운데 칼집을 내어 씨를 빼고 마늘과 젓갈, 부추, 당근, 사과 등을 넣어 담그면 ‘고추김치’가 된다. 콩가루를 버무려 찐 고추를 양념장을 넣어 버무리면 ‘고추무침’이다. 밀가루반죽에 풋고추, 마늘, 참기름, 소금 따위를 넣어 찌면 ‘고추물금’이다. 풋고추에 밀가루나 찹쌀가루를 묻혀 찐 후에 말려서 다시 식용유에 튀긴 음식은 ‘고추부각’이라 한다. 또 풋고추와 고기, 채소 따위를 꼬치에 꿰어 지지면 ‘고추산적’, 씨를 뺀 풋고추에 무, 배, 양파, 부추 따위를 버무린 소를 넣으면 ‘고추소박이’이다.

이밖에 고추장떡, 고추식혜, 고추장물, 고추장아찌, 고추전, 고추젓갈 등 고추를 주된 재료로 한 음식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고춧잎김치, 고춧잎나물, 고춧잎장아찌 등 고추의 잎을 재료로 한 음식도 여러가지이다. 앞으로도 고추를 이용한 갖가지 음식이 새롭게 선을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추 없는 밥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고추는 중국을 필두로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난다. 하지만 고추의 매운맛을 즐기는 데에는 한국인이 으뜸이다. 지난 400여 년 동안 우리 미각은 고추의 매운맛에 닳고 닳았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입시경쟁의 억압과 통제에 지친 지금의 청소년들도 매운맛을 상품화한 온갖 라면이나 벌겋게 양념한 떡볶이 따위를 즐겨 먹지 않는가.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풋고추, 절이김치

고추 때문에 밥상이 풍성해진 만큼이나, “작은 고추가 맵다.”처럼 고추와 관련된 말도 속속 생겨나 우리 말글살이를 풍성하게 했다. 예컨대 어떤 곳에 가서 한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꼭 틀어박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일러 “된장에 풋고추 박히듯”이라 한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처럼 잔꾀를 부리거나 허풍을 떠는 사람에게는 고추나무에 그네를 띄고, 잣 껍데기로 배를 만들어 타겠다.”며 일침을 가한다.

한편 심술이 고약한 사람이 하는 짓을 일러 “고추밭에 말 달리기”라 하고, 남이 도움을 부탁할 때는 일 못할 핑계를 대면서도 제 일은 잘만 하는 사람에게는 “눈 어둡다 하더니 다홍 고추만 잘 딴다.”고 한다. 늘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한 사람은 “풋고추, 절이 김치”라 부른다. 풋고추와, 풋고추로 담근 절이 김치가 얼마나 밥상에 자주 올랐으면 이런 말이 생겼을까. 한편 일을 시켜놓고 보수를 주지 않으려 하거나 쉴 틈을 안 주는 사람에게는 “고추밭을 매도 참이 있다.”고 항의를 한다.

고추장과 관련된 속담도 있다. “고추장이 밥보다 많다.”는 말은 “배보다 배꼽이 크다.”와 같은 뜻이다. 소중히 아껴 가면서 쓰는 물건은 “딸집에서 가져온 고추장”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미운 사람이 미운짓을 더 할 때는 “의젓잖은 며느리가 사흘 만에 고추장을 세 바탱이 먹는다.”고 한다. 소중한 딸과 관련을 짓든 미운 며느리와 관련을 짓든 간에 고추장은 귀하고 아까운 음식이다. 고추장을 만드는 데 그만큼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까닭이리라.

고추와 관련하여 우리 귀에 익은 노랫말이 있다.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 /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이다. 경상도의 구전동요를 밑절미로 삼아 1920년대에 윤석중이 작사하고 박태준이 작곡한 ‘맴맴’이다. 원제목은 ‘집 보는 아기의 노래’ 였는데 해방 후에 ‘맴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혼자 빈집을 지키다가 고추를 집어 먹고 매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마당을 맴도는 아기. 아마 한부모 가정에서 벌어졌을 그 쓸쓸한 풍경이 ‘고추 먹고 맴맴’이라는 후렴구에 함축되어 있다.

 

슬픔을 다스리는 묘한 쾌감

고추의 매운 맛을 내는 캡사이신 성분은 식욕 촉진뿐만 아니라 대사 작용을 활발하게 하여 지방을 태워 없애므로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또 일설에 따르면 고추의 매운맛은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입안에 불이 날 것 같은 통증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묘한 쾌감을 동반하는 건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다. 캡사이신의 진통 효과가 심리적 고통인 스트레스를 낫게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 매운맛을 즐긴다는 뜻도 된다.

우리 겨레가 유난히 매운 맛을 즐기는 이유도 유난히 강고한 유교적 신분질서 속에서 수백 년 동안 받아온 스트레스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중에서도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던 여성들만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도 드물었을 터. 그런 여성들이 차리는 밥상이 고추의 매운맛으로 장식되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초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하더라.”는 상주모심기소리가 해마다 들판에 울려 퍼진 것도 그런 까닭이었으리라.

지난 400년 동안 이 땅에서 억압받은 이들은 고추의 캡사이신으로 슬픔을 자르며 모진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에 슬픔이 응어리진 이들에게 캡사이신이 더한 상처를 내기도 한다. 거대한 슬픔이 응축된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쏘아댄 것도 캡사이신이었다. 억지로 슬픔을 자르라는 걸까. 하지만 매운맛으로 슬픔을 자르는 건 당사자의 마음으로 할 일이지 인공 캡사이신과 공권력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다.

 

 

↘ 박남일 님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등 우리말 관련 책을 썼습니다. 지금은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동네에서 우리말글을 연구하는 한편,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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