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호 2009년 겨울 살림,살림

[ 살리는 사람을 찾아서 ]

'희망은 지지 않는다'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글 김선미, 사진 류관희

 

평창동에 있는 희망제작소로 가는 길가 가로수는 얼추 잎을 다 떨궜다. 나무는 버짐처럼 벗겨진 수피를 드러낸 채 떨고 있는데 발치의 이파리들은 용케 부서지지도 않았다. 문득 희망은 플라타너스 이파리처럼 억세고 질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밤만 지나면 대용량 쓰레기봉투 속에 처박히는 신세지만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더미라 노래하던 시인의 절망 대신, 낙엽에 먼지를 털고 ‘희망’을 새겨 넣은 사람들 때문일까. 그 이파리 몇 개가 희망제작소 벽에 모셔져 있었다. ‘희망은 지지 않습니다’라고 글씨를 새긴 낙엽은 아름다운재단에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보내온 것이다. 겨울이 오면 잎이 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지만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부에 동참하는 평범한 시민들 때문에 희망은 ‘지지 않고(Hope does not fall)’, 인권의 후퇴와 소통의 부재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풀뿌리공익단체들이 있는 한 결코 ‘지지 않는(Hope can’t be defeated)’다”는 뜻을 시민들에게 전한다고 했다. 박원순 씨는 이 캠페인을 “희망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라며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희망제작소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박변’보다 바빠진 ‘원순씨’, 그래도 행복해
 

박원순 씨와의 인터뷰는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가 참여연대를 떠나 아름다운재단을 만들고 아름다운가게를 시작할 즈음이 처음이고, 희망을 만들겠다며 희망제작소를 세워 소셜디자이너라는 낯선 명함을 내밀 때가 두 번째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번 만남 역시 그가 ‘희망과 대안’이라는 구상을 펼쳐든 직후가 되었다. 희망과 대안은 시민운동의 ‘기계적 중립성’을 넘어서 내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시민사회단체가 뽑은 좋은 후보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00년 총선에서 낙천낙선운동을 벌이던 것과 반대로 긍정적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그 사이 시민사회가 성숙했다는 자신감일 수도 있고, 현실정치에 대한 절망이 깊어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산을 좋아하는 그와 함께 북한산과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얼어붙은 산길의 찬바람을 함께 맞은 뒤, 따뜻한 밥을 나누어 먹을 여유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보름 전에 잡힌 약속인데도 같은 날짜에 세 번씩이나 시간을 바꾸어가며 겨우 한 시간 남짓 짬을 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는 국정원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기업에 압력을 넣어 시민단체들에 대한 후원을 끊게 했다는 점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명예훼손에 대해 2억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당했다. 나 역시 대한민국의 구성원이니 꼼짝없이 그를 고소한 원고에 포함돼버린 셈이다. 그렇잖아도 눈코 뜰 새 없는 그에게 성가신 일정을 하나 더 추가시킨 소송이다.


전날 부산에서 새벽 1시에 올라왔다는 그는 우리가 만나러 간 날에도 아침부터 한 시간 또는 30분 간격으로 빽빽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살림이야기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국정원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변호사들과의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해 역삼동으로 저녁 7시까지 달려가야 한다고 했다. 그 뒤에는 9시에 분당에서 희망제작소 소장단 회의가 진행된다고 했다. 예상컨대 밤 11시나 12쯤 회의가 끝난 뒤 새벽 한두 시 경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일정들을 모두 대중교통으로 소화한다. 그리고 다음 날은 경남 남해, 김해, 부산에서 ‘좋은 시장학교’ 강연 등의 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정신이 혼미할 법도 한데 그는 조금도 일에 쫓기며 초조해 하거나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요새 신종플루 때문에 난리들인데 아플 겨를도 없으시죠?”
그의 바쁜 일정과 격무를 짐작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종플루보다 내가 더 빨리 다니는데 걸릴 새가 있나요!”
아니나 다를까, 환한 웃음으로 그가 답했다. 10여 년 전에 그를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젊어진 인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마저도 비껴간 것 같았다.
“요새 좋은 분들만 만나서 그런지 더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그가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일한 지난 3년 동안 전국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지역 공동체 복원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을 만나 온 것을 염두에 두고 건넨 이야기였다. 그러한 희망탐사기록은 올 초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가 일찍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검사 자리를 버리고 나와 1980년대와 90년대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했을 때나 그 변호사라는 기득권마저 접고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었을 때, 그는 늘 여느 사람들의 관행과 통념을 거스르며 권위주의와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싸움의 현장으로 자신을 던져 넣었다. 그런 점들을 떠올릴 때 ‘나눔’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는 이전의 활동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늘 똑같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인생행로를 바꾸게 한 독재정권조차도, 자신이 망가지지 않고 제대로 살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해온 그였다.


그는 서울대 법대 신입생이던 1975년 독재정권을 비판하며 할복자살한 김상진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에 단순 가담했다는 이유로 4개월의 옥살이를 하고 제적까지 당했다. 예기치 못한 불행은 오히려 그를 단련시킨 용광로가 된 것 같다. 그는 감옥에서 만났던 힘없는 무지렁이 범법자를 보면서 ‘죄인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재판관을 꿈꾸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법조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요동치는 우리 역사는 그를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관념으로만 탄식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기득권을 버리고 선택했던 고단한 삶이 오히려 자신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게 밀고 온 힘이었다고 긍정했다. 그런 긍정의 힘이야말로 그를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 아닐까.


지난 9월 14일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중에 그는 국정원으로부터 소송 당한 소식을 들었다. “저를 향해 2억 원이나 되는 소송을 제기했다니 영광”이라며 오히려 “이 시대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 것은 그의 지난 행적을 이해하고 보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는 이로 인해 다시금 정치권과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줄기차게 이어져온 그의 정치참여 여부에 대해 언론의 집요한 관심은 더욱 파고가 높아졌다.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있으시죠?” 이렇게만 물어 보아도 그가 먼저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에게 정치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묻는 세간의 질문들은 어쩌면 우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에 출마하거나 공직에 나가는 것만이 정치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정치참여가 가십성 화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재벌개혁, 부패한 권력에 대한 감시, 제도 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입법운동을 진행하던 참여연대 시절이나 시민사회의 토양을 두텁게 만들고 기부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시작한 아름다운재단,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희망제작소 등의 모든 활동이 과연 정치와 무관한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의미 있는 현실정치를 펼치고 있는 것 아닐까. 그의 대답도 물론 그랬다.


“정치나 경제가 뭐 별 건가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시민사회의 위기가 가속되는 것을 그냥 방관할 수 없으니까 발언도 하고 참여하자는 것뿐인데, 왜 저보고 직접 선거에 나서라고들 하는지… 그런 것은 제 역할이 아니에요.”


그의 명함에 새겨진 소셜디자이너라는 말을 떠올리며 “소셜디자인 자체가 생활정치 아닌가.” 묻자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로부터 월급만 받지 않았다 뿐이지 우리 사회를 위해 일해 온 공무원인 셈이라고 답했다. 그것은 정부와, 기업, 정파와 시민사회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 협력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온 희망제작소의 활동들을 보면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전문직 은퇴자가 비영리단체에 재취업해 사회봉사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돕는 행복설계아카데미나 소셜디자이너스쿨, 공무원학교, 좋은시장학교, 사회혁신기업가학교 등 실사구시형 생활정치의 여러 모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이 어떤 조직이든 대표 자리에 모셔져 ‘뒷방 마님’ 신세로 물러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현장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영원한 활동가로 남는 게 그의 바람이다. 실제로 그는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어디에서나 다른 분들을 대표로 모시고 자신은 늘 사무처장, 상임이사 등의 실무책임자로 일해왔다. 또한 그 역할조차도 안정화되면 늘 박차고 나가 다른 일들을 도모하곤 했다. 그런 자신을 두고 ‘일이 잘 되면 흥미를 잃고 다른 일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희망제작소도 올해 말이면 모든 게 자리 잡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압력으로 지방자치단체들과 약속했던 희망제작소의 모든 사업에 제동이 걸리고, 자신마저도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현실정치에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가 내심 예정하기로는 그동안 영국, 일본, 미국, 독일의 시민사회 탐방을 한 데 이어 중국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조금 늦춰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세간의 염려와는 달리 그는 어느 때보다 유쾌하게 일하고 있었다. 지금 희망제작소는 회원중심 조직으로, 외압에 흔들림 없이 거듭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신입회원을 위해 손수 앞치마를 두르고 김치찌개를 만들어 대접하는 ‘원순씨와 함께하는 김치찌개 Day’를 열고, 열 손톱에 알록달록 매니큐어를 칠하고 강연을 다니면서 10만 원씩 기부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씩 지워나가는 기발한 홍보도 하고 있다. 이렇게 형식과 권위를 파괴한 그의 행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희망제작소에선 그동안 줄기차게 그를 따라다니던 ‘박변호사’라는 호칭 대신 공개적으로 ‘원순씨’라 부르도록 하고 있다.


이런 ‘원순씨’의 열정에 사람들이 화답하고 있었다. 그가 당한 소송에 대해 원고인 ‘대한민국에서 내 이름을 빼라’는 인터넷 청원에 나서고, 희망제작소 자립을 후원하는 호프메이커스(Hopemakers)나 천사(1004)클럽 등에도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천사클럽은 지난 6월 희망제작소가 어려움을 겪으며 안국동 시내 한복판에서 평창동 마을 깊숙이 사무실을 옮겼다는 소식에 여행경비로 틈틈이 모아온 천만 원을 선뜻 보내온 후원자로부터 종잣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 돈을 차마 일상 경비로 쓸 수 없었다며 우리 사회 희망을 위한 천사의 손길 1004명을 모으기 위한 기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천사클럽에는 저금통이 가득 찰 때마다 희망제작소로 들고 찾아오겠다는 초등학생까지 참여하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박원순이란 이름으로부터 조직된 시민단체와 활동가, 자원봉사자, 후원회원들의 규모로만 보아도 그는 분명 성공한 사회적기업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돌아온 그의 대답은 자신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었다.
“영국에는 마이클 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생전에 50여 개 단체를 설립했대요.”


그는 지난여름 영국 리스본에서 열린 사회창안(Social Innovation)회의에 다녀오면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며 한결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마이클 영의 활동은 영국 사회에서 ‘교육과 주택, 보건, 소비자의 권리의 영역에서 제도적 개혁을 이룩한 장본인’으로 그 나라의 ‘가장 위대한 사회적 사상과 기관들의 씨앗을 뿌린 사람’,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평가받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일 욕심 많고 의욕에 넘치는 ‘원순씨’다운 말이었다.

 

 

지옥에 가서도 시민운동 하고 있을 것


2007년 막사이사이상 공공부문 수상자가 되었을 때도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당대에 평가를 받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냐’며 오히려 애도해야 할 일이라 말하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열심히 일하다 과로사 하는 게 자신의 소원이라는 말도 했다. 과로사 이야기를 물으니 자신은 유언장도 썼고 장기기증 약속도 마쳤으니 준비는 이미 끝났다는 투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아름다운재단의 유산 1% 기부운동을 펼치면서 유언장 미리쓰기를 권하며 자신의 유언장부터 세상에 공개했고, 생명나눔실천회를 통해 안구와 장기 기증 약속도 했다. 그러니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있다가 떠날 수만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저는 워낙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닦달하고 괴롭혀서 분명 지옥에 갈 거예요. 설사 천당에 간다 해도 거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예수님도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으니 천당이 아니라 분명 지옥에 가 계실 거예요.”

이런 말과 함께 자신은 지옥에 가서도 ‘지옥개혁시민연대’ 같은 단체를 만들어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함께 일해 온 활동가들 사이에 ‘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 ‘출장 갈 때마다 새로운 일거리 파일 100개씩은 만들어온다’는 말이 떠돌 만큼 소문난 일벌레다. 늘 치열하게 모색하며 앞서 나가는 그와 호흡을 맞추자면 어지간히 성실하고 부지런하지 않고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최근 지역 순례를 통해 우리 시대의 희망이라 소개하는 귀농자나 지역의 협동조합, 생명운동 활동가, 농촌공동체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빠른 속도, 경쟁이나 효율을 강조하는 세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기 십상이고 ‘느리게 살기’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이들일 것이었다. 늘 바쁘고 분주하게 사는 그와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의아하다고 질문을 던졌다.


“저마다 맞는 역할이 따로 있다고 봐요. 저보고 지역에 내려가 그런 삶을 살라면 그건 어렵겠지요. 저는 그렇게 대안적인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을 널리 알리고, 연결해드리는 일이 적당하지요. 그게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자신보다 먼저 도법스님이 생명평화를 화두로 전국을 순례한 예를 들면서, 자신의 역할은 그것과도 다르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기만 해요. 우리가 배울 점을 파악해 정리하는 작업을 3년째 계속하고 있어요.”
그는 순례가 아닌 ‘탐사’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전국을 돌았지만 아직 제주도를 비롯해 섬 지역까지는 가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또 이미 다녀온 곳일지라도 주제별로 세분화해서 다시 찾아가볼 생각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쉽게 현실에 대해 절망하지만 그는 그 지역을 돌면서 우리 사회에 희망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느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이 더 바빠졌을 것이다.


“지역에 찾아가 보면 다들 외로워해요. 희망을 일구고 있는, 우리 사회 거대한 희망의 단초들인데…. 내가 찾아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분들 하시는 일이 좀 더 의미있게 평가될 수 있어요.”
그는 이렇게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자는 생각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부가 제기한 어처구니없는 소송은 바쁜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정부의 옹색하고 치졸한 처사를 측은해하며, 어려운 문제들을 특유의 추진력으로 돌파해온 것처럼 이번에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풀어가고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이내가 깔릴 무렵 들어섰던 희망제작소 창밖으로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을 그곳을 나서 다시 플라타너스 낙엽 위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탁발순례를 마친 도법스님이 전국을 돌며 만난 사람 누구 하나도 행복해하는 이가 없더라고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 비해 ‘원순씨’는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오히려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그것은 희망을 밑천 삼아 끝없이 현장 활동가로 살겠다는 그의 다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서울 시내에만 연간 3만 여 톤의 낙엽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그중 올 겨울 ‘희망은 지지 않는다’고 써넣은 이파리는 창해일속만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희망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데서부터 피어나는 것일 터. 희망은 지지 않고 다만 새로 피어날 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뿐이다.    

 

글을 쓴 김선미 님은 ‘살림’하며 글을 쓰는 두 딸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바람과 별의 집》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단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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