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호 2015년 5월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사과·벼 농사짓는 충남 예산자연농회 김경희 씨 ]

“청년들, 사과 익는 ‘비빌 언덕’으로 와요”

글 김세진 편집부 \ 사진 류관희

봄놀이를 재촉하는 따스한 날들이 이어지다가 그날은 유독 바람이 매서웠다. 비까지 내리는 탓에 오슬오슬 떨면서 김경희 씨는 “그날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1년 되는 날, 충남 예산의 하늘도 짓궂었다. 하늘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과수원 사과꽃은 수줍게 발그란 얼굴을 막 내밀고, 배꽃은 활짝 만개해 화사함을 드러냈다. “사과꽃도 한두 송이 피기 시작했고 주변의 식물들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우리 꽃다운 아이들의 미소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라는 그의 블로그 글을 서울에 돌아와서야 보았다.

 

<잘 웃던 사람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얼굴이 굳기 마련인데 김경희 씨는 마치 타고난 모델 같았다. 화사한 과수원에서 일하면 저리함박웃음을 짓게 되는 걸까.>

 

김경희 씨는 올해로 30년 가까이 배와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예산자연농회 쉼터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6천612㎡(2천 평) 남짓한 과수원에는 사과나무 1천 그루와 배나무 30그루가 있다. 그중 30년 된 사과나무, 50년 된 배나무도 있으니 제법 오래된 과수원인 셈이다. 김경희 씨는 김수구 씨와 결혼하여 이곳으로 왔다. 처음 소개받고서 김경희 씨의 ‘배시시한 웃음’에 반한 김수구 씨는 김경희 씨가 있는 서울로 매일매일 편지를 써 보냈다. 그들은 1983년 봄에 만나 겨울에 결혼했다.

“농사의 농자도 몰랐으니까 왔지, 미리 알았더라면 못 왔을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또 처음엔 친구들도 없거니와 충청도 사람들이 마음 표시를 잘하지 않아 좀 힘들었어요. 하지만 과수원은 매일매일 참 신기하고 아름다웠어요. 오죽하면 적과한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니까요.”

열매를 실하게 맺게 하려면 같은 가지에 열린 작은 열매를 솎아 내야 하는데 그렇게 솎은 열매를 차마 버리지 못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자꾸만 꺼내 보며 위로를 받았다. 매 계절 다르게 돋아나는 꽃도 그에겐 경이로웠다.

 

아내는 사과농사, 남편은 벼농사

그렇게 수줍게 나무를 대하던 김경희 씨이지만 이젠 꽃눈도 과감하게 따 버린다. 4월 중순이라 사과꽃을 따는 적화가 한창이었다. 그대로 두면 한 가지 끝에 꽃이 6송이나 피어 꽃마다에 영양을 나눠 가지느라 하나의 열매도 제대로 실하게 맺기 어렵다. 일을 좀 편하게 하고 싶어 2000년 나무를 새로 심을 때는 홍로를 심었다. 키가 좀 작은 품종이라 사다리 없이도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열매를 딸 때 사다리를 써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고 간격을 다닥다닥 심어 힘은 매한가지로 든다. 나무에 꽃눈이 꽤 촘촘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물어보니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시작해서 점심 먹고 저녁까지 일하면 하루 세 그루 정도” 적화할 수 있단다. 저 많은 나무를 언제 다 손보나 싶어 일손의 도움을 받으라 했더니 “요즘 시골에는 일손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동네에 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고, 더러 결혼이주민 여성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일하러 올 때도 있는데 시내까지 나가서 데리고 오고 다시 데려다 주고 하려니 바쁜 농사철에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은 혼자 한다. 톱을 들고 해야 해서 힘쓰는 남자들이 주로 한다는 전지작업, 가지를 정리하는 일도 이제 김경희 씨 혼자 척척이다. 남편 김수구 씨는 친환경제제 등을 뿌릴 때만 사과농사에 힘을 보탠다. 김수구씨는 골치 아픈 벌레 때문에 친환경제제를 개발하고 매년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친환경제제는 분해가 잘 되어
뿌리고 하루 정도 지나면 효과가 절반으로 떨어지고 3~4일 후면 다시 벌레가 생긴다. 그래서 그는 스리랑카와 일본에서 자생해, 곤충 탈피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님오일이며, 고대부터 천연농약으로 썼다는 콩과 식물 데리스 등도 약으로 써 보았다. 지난해는 석회보르드액과 같이 썼는데 만족스러웠다. 물론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과가 탐탁지 않을 때도 있었다. 김경희 씨는 몇 년 전 농사지은 사과를 한살림 물류센터에 보냈는데 그 차가 그대로 다시 되돌아온 적도 있다고 했다.

“2008년에는 처음 무농약사과에 도전하면서 일 년에 친환경제제를 네 번밖에 안 쓰는 것으로 바꿨는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맛은 있어 그 사과를 모두 주스를 내는 가공산지로 보냈어요. 그러면 절반 가격도 못 받아요. 무척 속상하지만 그때마다 일희일비하면 농사 못 지어요. 한두 번 일도 아니고 다반사니까. 하늘이 하는 건데 내가 어떻게 해?”

 

 

<(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김경희 씨는 '저 알록달록한 과수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었다. 예산자연농회 쉼터에서는 과수원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서도 연둣빛의 한살림 표시가 눈에 띄어 쉼터를 찾는게 어렵지 않았다. (우) 그의 땀방울이 밥상에 올라왔다. 직접 주워 손수 쑨 도토리묵, 씀바귀, 머위장아찌, 땅두릅나물, 우엉조림, 배추김치. 김경희 씨는 조합원들이 다니러 와도 밥을 뚝딱 내어주곤 한다. 내 밥상 차리면서 숟가락하나 더 얹는 게 무어 그리 힘든가 하는 마음이 따스하다.>

 

 

오리농법·태평농법 거쳐 우렁이농법으로

약 칠 때를 빼고 대부분의 시간을 김수구 씨는 논에서 보낸다. 과수농사는 김경희 씨가, 벼농사는 김수구 씨가 책임지고 있다. 과수원을 안내해 주겠다며 앞서 걷던 부부에게 “이렇게 두 사람이 늘 같이 일하는지” 물으니 “늘 같이 일하고 싶지.”라는 대답이 그래서 돌아왔나 보다.

김수구 씨는 1만 1천550㎡(3천500평) 벼농사를 짓는데 유기농을 위해 여러 해 동안 만만찮은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농사를 처음 이어받았을 때 고작 18 살이었다. 그때부터 농사를 지었으니 벌써 40년이 넘었다. 1970년대 후반엔 많은 사람들이 농약이 안 좋다는 걸 모른 채 사용했고 김수구 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러 해 농사를 지으면서 옆 밭의 일꾼들이 농약을 치다가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또 이웃의 어떤 농부가 농약을 뿌리다가 잘 안 나오자 꼭지를 입으로 빨다가 죽는 사건을 겪으면서 농약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농약을 줄이고 있던 참에 1990년 교회에서 유기농 농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살림생산자연합회 초대회장인 김영원 씨의 이야기를 듣고 일 년에 두 번 뿌리던 농약마저 끊어 버렸다. 인근 네 농가와 함께 무농약 벼농사를 시작했지만 혹명나방이 날아와 벼잎를 갉아먹어 그해 여묾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벌레보다 더한 문제는 풀이었다. 제초제를 안 뿌리니 풀이 무성한데 손으로 뽑자니 끝이 없었다. 고민하면서 연구하던 중에 1994년 이웃 농부 최창구 씨가 오리농법을 들여왔고 함께 시작했다. 하지만 일주일만에 오리 300마리가 너구리에게 물려 죽었다. 사방에 오리 시체가 널려 있어서 논 근처에 가지를 못했다. 남은 50~60마리를 집에 데리고 와서 돌보았는데 그마저 2주 만에 다시 습격당했다. 상심이 커서 더 이상 오리농법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는 볏짚 등으로 땅을 덮어 잡초를 막는 태평농법을 시도했지만 지역 조건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러다 부안에서 농사짓는 김병국 씨를 만나 우렁이농법에 대해 들었고, 논 일부에 풀어 실험해 보았다. 다른 논에 풀을 매느라 신경을 못 쓰다가 20여 일 후에 가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렁이가 잡초를 모조리 잘라 먹어서다. 지금은 그의 농가를 비롯해 주변 농가들도 우렁이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소비자와 마음 나누는 재미 쏠쏠

부부 둘이서 버겁게 농사지으면서 생활하기 바빠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자 김경희 씨는 덜컥 겁이 났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한살림에 있으면서 소비자와 교류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산자연농회 농부들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장소도 마땅치 않아 아무도 나서지 못해 도시 소비자조합원과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다. 아무도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겠다 싶어서 김경희 씨는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도모했다. 2004년에 단오행사를 열어 조합원들을 부르고 이듬해 가을에는 벼를 베고 메뚜기를 잡고 떡을 메치는 가을걷이 잔치를 했다. 음식을 하는 게 큰일이지만 어차피 나 먹으려고도 하는데 조금 더 하자 마음먹으니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처음 몇 번이 힘들었지만 그 이후에는 입소문이 났는지 조합원들이 먼저 제안 해 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일들이 무척 재미있다. 언젠가는 태풍이 심하게 분 탓에 과실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그때 방문한 새내기 조합원들이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힘들게 농사짓는지 몰랐다”고 공감해 주어 참 힘이 되었다. 한살림 성남용인생협에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온 적이 있는데 아이들이 반질반질하지도 않고 크기도 작은 사과를 한번 먹어 보고는 “예쁜 거 말고 맛있는 사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참 보람되었다. 한살림경기남부생협에서는 유기농논에 있는 생물을 관찰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논의 굵직한 일들을 체험하는 ‘논살림위원회’ 활동을 3년째 같이하고 있다. 덕분에 김경희 씨도 자기 논에 그렇게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공부도 되고 재밌기도 해서 조합원들과 만나는 게 참 좋다.

하지만 이야기할 곳이 마땅치 않아 멀리에서 오는 조합원들을 비닐하우스에서 맞이해야 했다. 편하게 앉아서 대화하고 음식을 나눌 공간이 절실했다.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같이 공간을 마련하면 더할 나위 없지만 여력이 안되니 나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김경희 씨와 김수구 씨는 개인 땅을 내놓았다. 한살림생산자연합회와 지역기술센터의 지원을 받고 더 필요한 건 개인이 댈 마음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금을 먼저 지급하고 계약을 한 업체에서 공사를 진행하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다. 소송까지 거친 뒤 2013년 겨울에 지금의 쉼터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렇게 쉼터를 마련한 큰 이유 중 하나는 귀농하려는 청년들이 머무를 곳으로 사용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귀농하려는 청년-후계자 고민하는 농부 연결하고파

예산자연농회 공동체 회원 26명의 평균 연령은 70살이다. 그중에 자녀에게 농사를 물려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 공동체 안에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다들 고민이었다. 애써 만들어 놓은 유기농지가 없어지는 것도 안타까웠다. 김경희 씨 부부의 두 딸도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해서 남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고민되고 답답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누군가 사람을 만들고 연결하는 일을 해야 했다. 생산자로 지역과 한살림에서 활동하면서 충남 홍성협업농장과 전남 해남 미세마을 등 청년들이 같이 귀농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를 보았다. 그러면서 누군가 지역에 있는 사람이 먼저 장소를 제공해야 청년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겠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이 내려와서 1~2년 살면 이 지역에서는 땅을 얻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와서 농사짓는 것도 배우고 손모내기도 체험하고 묻고 하면서 농촌에 익숙해지고 정착하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은 거죠.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농촌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고싶어요.”

‘농사펀드’ 박종범 씨의 도움을 받아 김경희 씨는 청년 귀농에 대해 연구하는 ‘희망제작소’ 팀과 청년의 길을 농촌에서 찾으려는 ‘청년허브’ 팀과 함께 지속적으로 만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방법을 찾고 있다.

 

<저리 정답게 과수원을 거닐기도 하지만 부부는 보통 따로따로 일한다. 남편은 논에서 아내는 과수원에서>

 

소비자조합원들은 다 여잔데

농사도 짓고, 조합원들도 만나고, 한살림생산자연합회에서 생산자활동가도 하고, 귀농을 고민하는 단체 사람들도 만나고, 충남북부권역 여성대표도 맡고 있어 재미나게 생활하면서도 김경희 씨에게 답답한 게 한 가지 있다.

‘활동하는 조합원은 죄다 여자인데 생산자들 중에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은 왜 다 남자야?’ 하는 게다. 농도교류를 할 때도 밥하고 손님맞이할 준비는 여성생산자들이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결정을 하는 사람은 남성생산자들이다. 누구든 자기가 결정해서 하면 흔쾌히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면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여성생산자들 입장이 그렇다.

논을 가는 등 큰 힘쓰는 일은 남자가 해도 자잘한 농사 ‘뒤서러지’ 일들은 여자가 다 하는데,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나올 얘기들이 많은데 남자들만 회의하다 보니 정작 꼭 필요한 이야기를 못 한다. 김경희 씨가 참여하는 생산자연합회 회의도 여성들은 손에 꼽는다. 여성들을 회의와 공식적인 자리로 끌어내야 하는데 회의에 가면 더러 “여자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참 속상하다. 생산자연합회 여성위원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어 다행인데, 이때 여성들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관심 가질 거리들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때로 여성들 스스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기 꺼리기도 하는데, 경험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감수성이 농촌과 도시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감수성으로 그는 농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농사하면서 보면 자연은 만물박사인 거 같아요. 정말 신기하죠. 요만한 씨앗에서 싹이 나고 이만한 열매가 달리는게 얼마나 신기해요. 농부는 그저 보호자예요. 자기네 스스로 잘 자라는데 그저 뒤를 봐주는. 사실 농부도 작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재배하는 거잖아요.”

 

<(좌) "이화도 월백하여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하는 이조년의 '다정가'가 생각나는 풍경이 펼쳐졌다. 시인은 달빛 아래 빛나는 배꽃을 찬양했건만 햇빛 아래 화사한 배꽃도 만만찮았다. 김경희 씨는 그 배꽃을 다정하지 않게 솎아 냈다. (우) 홍천에서 농사짓는 손근오 씨가 빨간 우편함을 선물했다.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우편함이 정겹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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