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호 2009년 겨울 [특집]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 영화와 잠 ]

불면은 근대라는 괴물이 퍼뜨린 유행병

글 이영진

고딩 시절 유일한 보약은 커피였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대학입시가 평생을 보장해 준다는 말에 더 많이 속은 건 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책상머리에서 병 든 닭처럼 조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말없이 커피를 끓였다. 처음 마셨을 때만 해도 속이 쓰렸지만 커피에 대한 생체 거부반응은 며칠 지나자 없어졌다. 도리어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중독이 됐다. 고3 때는 학교 매점 자동판매기에서 하루에 5잔 이상씩 뽑아 마셨던 것 같다. 하지만 커피가 각성제 역할을 충분히 했는지는 의문이다. 달짝지근한 커피를 마시면 얼마 뒤에 하품이 나왔고, 곧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커피만 믿고 아들 감시를 게을리 했던 어머니는 아들이 재수생 신분이 되는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잠과의 두 번째 사투는 군에 입대했을 때였다. 후방으로 자대 배치를 받은 뒤 떨어진 ‘미션’은 초소 경계 근무. 밤낮이 따로 없었다. 낮엔 하릴없이 삽질하다 새벽 근무에 들어가야 하는 일상이었다. 특히 새벽 3시부터 아침 8시까지의 시간대의 근무는 고문에 가까웠다. 새벽에 기상해서 어두컴컴한 산길을 타야 한다니. 일병 때는 꼿꼿하게 선 채로 선잠이 들곤 했지만, 상병이 되자 두 눈 부릅뜨고 나라 지킬 정신력 따위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인근 초소에 후임병들이 배치되기 시작한 뒤로 초소에 오르면 목숨과도 같은 총을 헌신짝처럼 버려두고, 방한용 난방기를 애인처럼 껴안고 수면을 취했다. 달콤한 잠은 아니었다. 저벅 저벅, 머리 없는 괴물 순찰자의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악몽을 지금도 꾼다.


젊은 날의 고행이 전혀 쓸모없진 않았다. 학교에서 엎드려 자기, 군대에서 쪼그려 자기로 단련된 신체 아니던잠가. 사무실의 책상과 의자를 ‘라꾸라꾸’로 자유로이 변형한 뒤 2시간 이상씩 숙면을 취하는 비기(秘技)를 본 후배들은 매번 ‘브라보’를 외친다. 하지만 수습시절에도 그럴 순 없었다. 전날 취재원과의 술자리 여파로 비몽사몽, 시사회에 갔다 눈 뜨면 언제나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선배들이 양쪽에 앉아 샌드위치 마크를 하는 날이면 ‘싹수 있는’ 후배임을 증명하려고 허벅지를 꼬집었지만 허사였다. 마감의 고통은 더했다. 너 하나 때문에 잡지 제작 공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는 눈총을 받지 않으려면 적어도 1주일에 하루는 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내 몸은 여전히 수면결핍 상태다. 토막잠에, 불면증까지 달고 산다.

 


<인썸니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2002) / 사진 <씨네21>

 

불면증이 사회적 병임을 보여준 영화, <인썸니아>


모든 인간은 ‘털이 없는 원숭이’라고 규정한 데즈먼드 모리스는 《맨워칭》에서 “아이들은 성인보다 잠을 더 자고, 중년은 노년보다 잠을 더 잔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머리속에 입력해야 할 양이 거대하므로, 아이들은 이러한 모든 새로운 정보를 분류, 정리하기 위해서 오랫동안의 수면이 필요하다. 반면에 노인들은 방법면에서 이미 지정되어 있고 많은 양의 새로운 정보도 (뇌속에) 입력되지 않으므로 보다 짧은 수면을 취한다”는 것이다. 내 경우를 돌아보면, 이 동물학자의 말은 그닥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영아의 긴 수면시간을 설명할 순 있지만 성인의 불면증을 밝혀내진 못한다. 무엇보다 그에게 불면증은 ‘개인적인’ 신체 이상의 신호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썸니아>(2002)에서 불면증은 ‘개인적인’ 신체 이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이상 증후임을 보여준다. 윌 도머(알파치노)는 동료와 함께 알래스카에서 일어난 10대 소녀 살인사건에 투입된 강력계 형사다. 시체의 상흔만 보고서 사건의 앞과 뒤를 손쉽게 꿰맞출 정도로 그의 능력은 출중하다. 용의자는 어느새 윌이 놓은 덫에 빠져들고, 촌뜨기 형사들은 모든 사건이 곧 종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전설적인 베테랑 형사는 어찌된 일인지 눈앞의 용의자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고, 급기야 자신의 파트너를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한다. 알래스카의 백야(白夜)로 인한 불면증 때문에 윌은 판단력을 잃고 예기치 못한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윌의 불면증은 수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다. 윌은 악행을 처벌하기 위해서 법의 울타리도 넘어야 한다고 믿는 형사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수사 행위가 언제나 법의 울타리 안에서 이뤄졌다고 다잠른 사람들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LA는 불법을 은닉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밤이 없는 알래스카에서 윌은 자신의 수사 방식이 실은 또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윌은 근대의 도래와 함께 요구된 ‘합리적 인간’의 표본이다. ‘살인사건은 언제나 72시간 안에 수사를 마쳐야 한다’는 전제 아래 모든 사건의 처음과 끝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묶어내야 했던 윌의 강박은 불면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김씨표류기> 이해준 감독(2009) / 사진 <씨네21>

 

엘뤼네드 서머스브렘너는 자신의 저서 《잠 못 이루는 밤》에서 불면은 근대라는 괴물이 퍼뜨린 일종의 유행병이라고 말한다. 근대는 자연적인 시간을 변형했고, 변형된 시간은 인간의 의식을 지배했다. 그는 불면을 치료하기 위해선 느리게 살기(Slow Living)가 유일한 처방이라고 덧붙인다. 극단적으로 죽음을 택한 <김씨표류기>의 남자가 한강의 밤섬에서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었던 건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넥타이와 시계와 핸드폰이 무용지물이 되어서다. 처음에 그는 어떻게든 뭍으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직접 짠 느린 삶의 시간표에 만족하고 구조 요청을 포기한다. 행복은 그렇게 찾아온다. 누군가 강요한 시간표를 들고선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찾아갈 수 없다.


사족 하나. 3년 전 하노이에 갔을 때 일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시내의 한 해산물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적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친구를 만난 자리였는데, 그가 현지에서 사귄 사람들을 초대한터라 식사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졌다.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졌던 건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토록 바삐 움직이던 종업원들이 태업이라도 하는 양 손을 놓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말고도 서너 테이블에 손님이 더 있었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아랑곳 않고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알고 보니 시에스타, 낮잠 시간이었다. 지중해에만 있는 줄 알았던 시에스타가 베트남에도 있었다. 주문을 할라치면 사장을 직접 불러야 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다. 웰빙 열풍을 타고 이 카피는 유행어처럼 번졌다. 하지만 난 이 카피가 너무 싫었다. 재충전이야말로 창조적으로 삶을 가꿀 수 있는 자양분이라는 뻔한 이야기를 송두리째 부정하진 않는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삐딱한 내 귀에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열심히 일한 당신들만, 떠나라!’ 주어진 일을 완수하지 못한 이들은 방바닥이나 긁으란 말인가. 하노이에서 우연히 시에스타를 마주했을 때 그 카피의 이중성이 떠올라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토록 선망하는 한국을 닮기 위해선 시에스타의 행복을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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