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호 2014년 12월호 살림,살림

[ 시골살림 길잡이-겨울 주전부리 보관하기 ]

겨울철 음식 저장의 새로운 경지 ‘냉수 저장고’

글 \ 사진 전희식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다 보면 어떤 해법을 찾기 위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매달릴 때가 있다. 앞뒤 기억을 되풀이해서 돌아보면 기억이 더 뚜렷해지기도 하지만 끝내 비어 있는 몇 군데는 상상력으로 미루어 짐작하기도 한다. 촌놈으로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내 몸속에는 ‘촌놈 디엔에이’가 깊이 박혀 있나 보다. 이번에는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하나는 말린 무와 고구마를 실에 꿰어 조청에 절여 먹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욤을 독에 저장했다가 한겨울 눈 내리는 어느 날에 한 숟갈씩 떠먹던 기억이다.




쫀득쫀득한 고구마와 달달한 고욤의 천생연분

올해 고구마농사가 풍년이긴 한데 알이 무척 잘았다. 대신 맛은 좋았다. 하늘은 공평한지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크면 맛이 없고 잘면 맛있다. 땅 관리를 잘 해서 알맞게 키우는 것이 농부의 관록이다. 서너 번 나눠 캐다 보니 늦게 캔 고구마는 서리를 두 번이나 맞은 탓에 몇 군데씩 점박이가 박혀 썩었다. 고구마는 만약 귀퉁이 한군데라도 얼어서 썩었다 하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썩어 들어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했더라?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인터스텔라> 웜홀을 통해 50년 전 고향 마을로 간다.
안방 머리맡에 볏짚 사이사이 싸릿대를 넣어 엮은 고구마 뒤주가 있고 그 안에 있는 고구마는 결코 썩는 적이 없었다. 상처 난 고구마도 없었다. 고구마 캐는 날부터 며칠 동안은 밥 위에도 고구마요, 새참도 고구마였다. 주로 상처 난 고구마들.
호미에 상하거나 귀퉁이가 얽은 고구마를 가려내 그때처럼 먼저 먹지만 며칠 지나서 보면 고구마 상자에는 두세 개씩 썩어 가는 게 꼭 보인다. 문득 또 떠오른 기억은 어릴 적 뒷산에서 나무 한 짐 해 오면 어머니가 살강 어딘가에서 조청에 버무려 쫀득쫀득한 고구마 조각을 꺼내 주시던 장면이다.
감추기에 능수인 어머니는 많은 자식들을 고루 먹이기 위해서 도무지 찾아낼 수 없는 곳에 겨울 먹을거리들을 숨겨두고는 조끔씩 꺼내 주셨는데, 그때 먹던 그 고구마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겨울철에 먹기 좋은 쫀득쫀득한 고구마를 만드는 중. 군불 때는 솥에 받침대를 걸치고 고구마를 쪘다. 장작불을 조절해 젓가락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살짝 찐다. 찬물에 급히 식힌 다음 자르는데 자를 때는 떡국 떡을 썰 듯 칼로 길게 삐치듯이 자른다.

 


자잘한 고구마와 귀퉁이가 상한 고구마를 중심으로 잘 씻고 칼로 다듬어서 군불 때는 솥에 받침대를 걸치고 쪘다. 물에 잠기게 삶으면 너무 물러 식감이 좋지 않다. 말리기도 힘들다. 장작불을 조절해 가며 젓가락을 찔러서 겨우 들어갈 정도로 고구마를 살짝 쪄냈다. 찬물에 급히 식혀서 칼로 길게 삐치듯이 잘라서 말렸다.
모양으로 따지자면 세로로 길게 자른 떡국과 비슷하다. 밤에는 집에 쥐들이 극성이라 우선 부엌으로 들이고 날이 새면 앞마당 볕에 말리기를 1주쯤 했더니 고들고들해졌다. 더 말리면 안 된다. 감자칩은 바짝 말려서 수분을 없애야 하지만 고구마는 감자칩처럼 튀길 게 아니니까 쫀득쫀득할 때 밀봉한다.
말리면서 당도가 많이 올랐는지 그냥 먹어도 달았다. 그래도 입맛에 따라 더 단 걸 원하는 사람은 잼 대신 찍어 먹으라고 100년도 더 된 앞마당 고욤나무에 올라가 고욤을 따서 통에 담았다. 빈틈이 생겨 공기 접촉이 많아지면 곰팡이가 피기 때문에 주걱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한 달 정도 숙성시키면 떫은 기가 싹 없어진다. 둘이 궁합이 맞아 한겨울에 좋은 주전부리가 될 것이다.

 


 

고욤을 삭히면 꽤 달다. 잼 대신 찍어 먹기 그만. 앞마당에 있는 100년도 더 된 고욤나무에서 고욤을 따 통에 꾹꾹 눌러 담았다. 빈틈이 생겨 공기 접촉이 많아지면 쉬 곰팡이가 핀다. 한 달 정도 숙성하면 떫은 기가 싹 없어진다.



여름·겨울 공용 냉수 저장고


문제는 보관이다. 겨울 음식 보관에는 지난 호에서 공개한 왕겨 보관법 못지않은 게 바로 냉수 저장고이다. 독특한 내 발명품이다. 그 효시는 여름철 흐르는 계곡물에 반찬통과 과일을 푹 담가두는 것이었다. 누구나 하는 방법이다. 그게 냉수 저장고로 한 발자국 더 발전한 것은 물의 기화열을 이용하면서이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겨울철에 보온재로 저장고를 둘러싼 것이다. 여름에는 보온재 대신에 부직포를 여러 겹 둘러싸서 그 둘레에 일정한 양의 물을 흘려 넣으면 이것이 부직포 속으로 빠르게 번져 가면서 기화열이 생기는데 그 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물 1g당 80㎈의 기화열이 저장고 내부의 온도를 내려 준다. 부직포의 표면적을 최대치로 만들어야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는 ‘기화’가 잘 된다. 저장고를 그늘에 두고 저장고 표면에 공기 흐름을 원활하게 하면 효과적이다. 전기 1W도 안 쓰고 음식을 시원하게 저장할 수 있다. 더운 날 마당에 물을 뿌리면 시원해지는 원리와 같다. 내게 김치냉장고가 없다는 걸 알고 쓰던 것을 주겠다는 분이 있었지만 거절한 이유는 냉수 저장고를 겨울용으로 변형해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 저장고가 기화열을 이용한 것이라면 겨울철 저장고는 물의 어는점을 이용한 것이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내려갈수록 비중이 커지고 부피가 줄어들지만 물은 다른 특징이 있다. 4℃에 가장 비중이 높다. 0℃가 되면 그때 언다.
그렇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져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하면 섭씨 4℃가 된 물은 비중이 커지면서 아래로 가라앉고 0℃에 이르게 되는 표면은 언다. 추워서 얼음이 꽝꽝 얼어도 얼음장 밑의 물이 얼지 않는 이유다. 물통에 담긴 물의 아래쪽 역시 그렇다. 보온재가 물통 측면의 냉기를 막아 주고 물통 위쪽만 겨울 추위를 접촉하기 때문에 물통 속은 4℃를 유지한다. 음식 보관하기에 아주 적절한 온도다.
물통 위에 얼음이 얼면 음식을 꺼낼 만큼만 깨면 된다. 비닐봉지에 1회분씩 밀봉하여 넣어 둔 저장음식에는 김치도 있고 생밤도 있고 단감도 있다. 내가 사는 덕유산 기슭처럼 날씨가 추운 곳이면 더욱 좋다. 물통은 외부 창고에 두는 게 좋다. 본격적인 겨울이 되어 영하 10℃가 계속될 즈음에는 왕소금을 한 바가지 넣어 주면 제대로 성능을 발휘한다. 어는점이 더 내려가기 때문에 음식을 꺼내기가 좋다.
하나 더 주의할 게 있다. 비닐봉지에 음식을 담을 때는 공기가 비닐봉지 속에 전혀 들어가지 않게 해야 된다. 그래야 음식이 물통에 어중간하게 반쯤 떠 있지 않고 물속에 안전하게 가라앉는다. 음식들이 각기 부력을 받으니까 유영하듯이 짓눌리지 않고 꺼내기 좋다. 공기를 효과적으로 빼내는 방법은 지난 호에 소개한 대로 진공청소기가 최고다.

 

 

여름철 흐르는 계곡물에 반찬통과 과일을 푹 담가 두었던 것을 이용해 냉수 저장고를 발명했다. 여름에는 물을 담은 통 주위에 부직포를 둘러 거기에 일정한 양의 물을 흘려 넣어 기화열을 이용하고, 겨울에는 보온재로 그 주위를 두른다. 효과는 김치냉장고 못지않다.



↘ 전희식 님은 농민생활인문학 대표이고 녹색당 농업먹거리위원장입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지켜 드리자는 생각에 전북 장수군 산골로 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 《시골집 고쳐 살기》 등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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