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호 2014년 10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

노인만을 위한 마을은 없다 고령화 시대 공동의 삶

글 하승우

요즘 나이가 들면 가까운 사람들과 모여 살고 싶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불안한 위험사회, 고독한 무연사회(無緣社會, 혼자 살다 고독하게 죽는 사회를 뜻하는 일본말), 조각난 가족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두려움을 느낀다. 50살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고(知天命), 60살이 되면 이치를 깨닫는다(耳順)는 말은 무의미해진지 오래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같이 사는 게 왠지 든든해 보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관계가 함께 살 만큼 가까운 것일까?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不可近 不可遠)는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노후를 위한 집과 마을
주총연 고령기거주위원회 지음 / 박준호 옮김 / 클 펴냄 / 2014년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010년

 

현시창
임지선 지음 / 이부록 그림 / 알마 펴냄 / 2012년

 



문을 열어야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1947년에 설립된 주총연의 고령기거주위원회가 쓰고 엮은 《노후를 위한 집과 마을》(2014)은 이런 궁금증을 풀기에 좋은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문을 열고,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아가다’이다. 잘 보자. ‘사람을 만나고 함께 문을 여는’ 게 아니라 ‘문을 열고 사람을 만나다’이다. 이 책은 자기 집을 개방해서 마을을 만든 사례, 자기 집 밖에 또 하나의 집을 찾은 사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주택 사례 등을 다룬다.

 

사실 과거에 한살림운동이 강조했던 것도 문을 여는 것이었다. 다섯 가구 이상의 공동체공급은 누군가의 집이 열려야 가능했고, 그 열림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더 아름다운 마을을 꿈꾸지만 정작 우리 집 문을열려고 하지는 않는다. 집보다는 모임방이나 카페가 편하다, 또는 쿨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노후를 위한 마을을 꿈꾸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건 어쩌면 누구도 자기 집 문을 먼저 열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재단법인 세타가야 마을만들기 트러스트는 2006년부터 ‘지역공생의 집’ 사업을 했는데, 집을 개방하는 다양한 방법을 지원해서 열 채 이상의 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사업은 “각자 능력 안에서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활용해, 계속 살아온 땅과 집을 마을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모았고 “각각의 ‘집’에는 그 땅과 가족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을 실현했다. 집의 기획부터 개·보수, 개설 후 운영까지 지원하는 재단의 활동은 시사점을 준다(아파트는 구조적으로 이런 변화가 어렵지만). 이 역시 내가 먼저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부담감도 생긴다. 그렇게 개방하면 내 사생활은 어떻게 보장될까? 모든 일에는 주고받는 게 있는 법, 사생활보다 삶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심지어 백 살 시대 아닌가. 그렇다면 노인에게도 일거리가 필요한데, 노인의 일거리는 지역을 벗어나면 지속되기 어렵다. 물품이나 서비스의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서로가 서로의 삶을 ‘충분히’ 공유해야 한다. 복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그냥 좋은 가치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것이어야 한다. 책에는 “13명의 노인, 4명의 여성 회사원, 일반 가족이 함께 사는 공동주택” 이야기도 있다. 이 주택의 “여성 회사원과 일반 가족에게는 고령의 거주자와 일상적으로 관계를 갖는 것 자체에 대해 월 3만 엔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집세가 3만 엔 싸”다. 이들에게는 “서로의 거리감을 느끼면서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는 현실감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서로 큰 기대만을 품고 공동주택을 지었다가 관계가 끊어지거나 나빠지면 그 생활공간은 끔찍한 지옥으로 변할 수 있다. 물론 그 지옥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할 수 있지만. 공동체는 가치로만 구현될 수 없고, 특히 노후의 공동체는 더욱더 그러하다.


억지로 만든 최대공약수가 아니라 소소한 최소공배수로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2010, 송해성 감독이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었지만 ‘안습’이었다)에서 마을 노인들은 빌라 앞 소파에 앉아 끊임없이 주민들을 염탐하고 수군거린다. “애써 무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노인들의 호기심은 안쓰러우리만치 애절해 그들의 탐욕스런 시선은 언제나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느라 분주했다.” 노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참지 못하고 끝없이 차이를 공격한다. 어쩌면 우리가 노인이 된 뒤에 살 마을의 모습도 누군가의 눈엔 그렇게 비칠지 모른다. 그 마을에 누가 살러 들어올까?

 

이 소설에서 노인들의 주된 먹잇감인 주인공의 집은 가족이라고 말하기엔 서로를 끝없이 지겨워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 늙어서 다른 곳으로 가기는 어렵기에 같이 모여 산다. 이들에게 가족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같이 있을 땐 원수처럼 미워하다가도 막상 없으면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각기 다른 핏줄과 이해관계를 가진 가족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라면은 역시 삼양라면이지”라는 아주 사소한 취향만으로도 가족이 구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억지로 만들어낸 최대공약수가 아니라 사소하고 소소한 최소공배수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

 

임지선의 《현시창》 (2012,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은 지금 청년들이 겪는 세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에게 마을은 어떤 의미일까? 시궁창같은 현실에서 힘겹게 일하고 돌아오는 청년들에게 노후를 위한 마을은 어떤 느낌을 줄까? 빌라 앞 소파에 앉아 잔소리를 늘어놓는 노인들에게 어떤 마음을 품을까? 그들도 늙으면 노후를 위한 마을을 꿈꿀까?

 

좋다 싫다를 떠나서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청년들 없이 마을은 지속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을을 꿈‘만’ 꾸는 것이 공허한 만큼 우리‘끼리’의 마을을 꿈꾸는 것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노후를 위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그 마을에서 청년들은 어떻게 살까?



↘ 하승우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충북 옥천으로 가 자치와 자급의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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